본문 바로가기
  • 오늘처럼
무한을 추구하는 광인들

아벨 - 9번째 수학자.

by bluefriday 2012. 2. 7.
반응형

오랜만에 졸업 프로젝트 제안서 때문에 학교를 갔는데 이건 웬 칼바람인지 ㅠ_ㅠ.. 그냥 집에 가기엔 좀 아쉬워서, 중도에 갔다. 보통 갈루아와 비교되는 비운의 수학자 아벨. 왠지 모르게 끌리는 느낌에 오늘은 아벨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

                   (잘 생겼다..) 

1. 이름 : 닐스 헨리크 아벨(Niels Henrik Abel)
2. 국적 : 노르웨이
3. 고향 : 노르웨이의 핀되(Findo)지방
4. 직업 : 수학자
5. 출생 : 1802.8.5 ~ 1829.4.6. 
코펜하겐 대학을 졸업한 목사 아버지(Soren Georg Abel)와 쾌활한 성격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어머니(Anne Marie Simonsen)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에 둘째로 출생.   
  
6. 일생 

아벨이 태어날 당시의 노르웨이는 스웨덴,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재정적으로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고 한다. 아벨의 집안 역시 매우 가난했었는데, 학교에 다니던 시절 15살 무렵까지는 별 다른 천재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의 국가적 교육방식은 조금 군대식으로 진행되어서 학교에서의 체벌이 허용되었는데, 아벨의 친구가 그 당시의 폭력적인 교사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후에 죽게 되는 걸 보면서 여기에 자극을 받아서 일종의 오기로 수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폭력적인 교사는 학생의 죽음으로 인해 해고되고 그 후에 홀름보에라는 선생님이 부임하게 된다.

아벨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홀름보에 선생님(Bernt Michael Holmboe). 홀름보에는 수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실력있고 훌륭한 교육자였나보다. 아벨의 수학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이를 격려하며 그가 수학에 눈을 뜨게 해준다. 나중에도 평생 아벨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재정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아벨이 죽고 10년 뒤에, 아벨의 연구 논문집의 초판을 편찬하는 사람도 홀름보에 선생님이다.

16살이 됐을 때는. 뉴턴, 오일러, 가우스, 라그랑주 등의 책을 많이 보면서 혼자서 이를 독파했다고 하는데. 이때 가우스의 '수론연구'와 같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한번은 오일러가 이항정리를 유리수의 곱셈에 대해서만 증명한 것을 보고 나머지를 자신이 채워넣는 성실함(?)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20년(18살)에는 아벨의 아버지가 죽게 되고 어머니와 6남매를 부양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지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낙천적이고 유순한 성격을 바탕으로 개인교습 등의 일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 나간다. 사견이지만, 위의 아벨의 초상화를 보면, 어머니로부터 아름다운 외모까지 물려 받은 것 같다.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수학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수학교수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수학 공부를 했다고 한다.

1821년(19살)에는 자신이 연구하던 대수학 부분에서 5차 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결론에 도달하여 일반적인 해를 구했다고 생각하면서 덴마크의 유명한 수학자인 데겐에게 자신의 5차 방정식 해법에 대한 결과를 보낸다. 그간 많은 수학자들이 5차 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는데 데겐은 다행히도 아벨의 해법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이보다 더 특별한 경우에 대해서도 더 연구할 것을 권유한다. 아벨은 이에 추가적인 연구를 하다가 자신의 이전 5차방정식 해법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벨은 5차 방정식의 해를 구할수 있는 일반적인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같은 해에 일반적인 5차방정식을 거듭제곱근으로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거듭제곱근으로 풀수 있는 방정식에 대한 필요충분 조건을 완벽하게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갈루아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후술하겠지만, 불운의 수학자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은 셈이라고 생각된다.

'5차 방정식의, 정확히는 4차 이상의 고차 방정식의 거듭제곱근을 통한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 그러니까 '아벨의 정리'는 사실 1799년 루피니(paolo Ruffini)가 먼저 발표 하긴 했지만, 이 증명이 이론적으로 불완전했다는 점 때문에 무시되어 왔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엄밀히 '아벨-루피니'의 정리라고 부른다.

다시 아벨의 일상으로 돌아와보자. 1822년 크리스티아니아 대학(Kristinania, 오늘날의 오슬로 지방) 을 졸업한 아벨은 그 동안의 자신의 연구성과를 저명한 다른 수학자들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교수직을 맡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 당시의 가난한 노르웨이 정부는 외교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1년이 더 지난 뒤에, 덴마크로 건너간 아벨은 이 곳에서 친척들의 소개로 크렐리(Christine(Crelly) Kemp)를 만나고 그녀와 약혼하게 된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2년이 더 지나서야 노르웨이 왕의 명령에 따라 정부는 아벨에게 1년 동안 프랑스, 독일을 여행할 수 있는 경비를 지원하는데 먼저 그 해 9월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수학자들을 만나러 돌아다닌다. 하지만 정작 독일에 있는 가우스는 만나지 않고 베를린으로 향한다.

아벨이 일전에 5차 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벨의 정리'를 담은 논문을 자비로 출판해서, 평소에 자신이 동경하던 가우스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근데 가우스가 이를 보지도 않고 독설을 쏟으며 던져버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노르웨이의 가난한 재정으로 만든 논문이 상당히 볼품 없어 보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쨋든 그 이후로 아벨은 가우스를 매우 미워하면서 평소에도 그에 대한 악담을 했다고 한다.

베를린으로 간 아벨은 이곳에서 홀름보에선생님처럼 일생동안 아벨을 도와준 크렐레를 만나게 된다. 당시 크렐레는 상업학교의 시험관직으로 있었는데, 아벨이 그를 찾아갔을 때. 크렐레는 시험관직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근데 아벨이 크렐레에게 그가 쓴 논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오류를 지적하자. 크렐레는 자신의 논문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고 아벨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면서 수학적인 토의를 했다고 한다. 특별히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던 크렐레는 아벨이 하는 말들을 모두 이해하진 못 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는 그 뒤로 아벨의 일생 동안 그를 후원해준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책의 투고자로도 선정해줬으며, 자신의 '잡지'에도 그의 논문을 실어주었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그를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초빙하는데까지 성공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벨은 건강문제와 재정문제로 고향을 돌아가게 되고 아벨이 죽고 나서 이틀이 지나서야 교수 초빙 연락이 닿게 된다.


그 후에 조용한 분위기를 찾기 위해서 독일에 있는 프라이부르크에 도착한 아벨은 여기서 드디어 그동안 구체화되지 않았던 '아벨의 정리' 를 완성한다. 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프랑스 파리로 가서 르장드르, 코시, 아셰트, 포아송, 푸리에, 앙페르 등을 만나는데, 다들 의례적으로 친하게만 대우했을 뿐 연구업적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벨이 여러 수학자에게 왔다갔다하며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너무 안타까운 부분이다.

처음에는 '아벨의 정리'가 담긴 '매우 확장된 종류의 초월함수들의 일반적성질'이라는 논문의 심사를 위해서 이를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하고 프랑스를 떠나는데, 당시 논문의 심사위원으로 지명된 르장드르코시로부터 2년 동안이나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자 그는 결국 친구인 야코비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야코비가 이를 따지기 위해서 1829년 3월에 르장드르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는 논문이 잉크가 변형되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라면서 다시 잘 정리해서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아마 코시가 논문을 잘못 처리해서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자료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이에 파리에 있던 노르웨이 영사관이 과학원에가서 따지면서 작은 외교적인 소란을 야기하자 결국 코시가 논문을 복구했고, 심사에 들어가서 1830년 그러니까 아벨이 죽은 1년 뒤에야 야코비와 아벨에게 대상을 수상하고 모든 실수에 대해서 변상하게 된다.

다시 아벨의 일생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더 살펴보자. 프랑스에서 돌아온 아벨은 가난과 그로 인한 영양부족에서 온 결핵 및 흉곽 합병증으로, 약혼녀인 크렐리가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던 프롤란드(Froland)에 있는 영국인 스미스 부부의 집에서 요양하게 된다. 크렐리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 되는데, 이 와중에도 아벨은 자신의 후원자인 베를린의 크렐레에게 계속해서 연구 결과를 보내고 또 자신의 친구인 키엘하우(Baltazar Mathias Keilhau)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이 죽은 뒤에 약혼녀인 크렐리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남긴다. 결국 26년 8개월이라는 짧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182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나고 프롤란드 교회에 묻히게 된다. 또한 아벨이 죽은 후에 그의 친구 키엘하우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크렐리와 결혼하게 되고 아벨을 위한 영구적인 기념비를 프롤란드 교회에 세우게 된다.

또한 시간이 지난 뒤에, 노르웨이 정부에서는 아벨을 기리기 위해서 '아벨상'을 제정하고 매년 응용수학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자에게 이를 수여하고 있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며 노르웨이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서 인정받아서, 그의 얼굴이 노르웨이 우표와 지폐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7. 평판
야코비 "이것은 내 작품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어떻게 칭찬을 해도 부족하다."

에르미트 "그는 수학자들을 500년 동안 바쁘게 만들 무엇인가를 남겼다."

-------------------------------------------------------------------------------------------------
굳이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아벨의 일생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노르웨이가 국가적으로 빈곤한 나라만 아니었더라도, 가우스가 그의 논문을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코시와 프랑스 과학원이 그렇게 불성실하게 대처하지만 않았어도, 좋은 환경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에 대수학의 발전에 더 많이 기여하고 아름다운 논문들을 많이 쓸수 있었을텐데. 갈루아와는 조금 다른 아쉬운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대가들의 제자가 아니라, 대가들을 직접 배움으로써(최고 단계로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접근하냐는 질문을 받은 후에, 아벨의 답.)



 


'무한을 추구하는 광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카르트 - 8번째 수학자  (1) 2012.01.31
페르마 - 7번째 수학자  (2) 2012.01.14
파스칼 - 6번째 수학자  (1) 2011.12.31
오일러 - 5번째 수학자  (7) 2011.12.04
갈루아 - 4번째 수학자  (5) 2011.11.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