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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추구하는 광인들

오일러 - 5번째 수학자

by bluefriday 2011.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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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 레온할트 오일러 (Leonhard Euler)
2. 출생 : 1707.4.15 ~ 1783.9.18. 스위스 바젤(Basel) 지방에서 태어남.
3. 가족 : 아버지(Paul Euler)는 칼뱅파의 목사.
4. 국적 : 스위스
5. 직업 : 수학자.

6. 일생 :


수학사에서는 흔히 세계 3대 수학자로 '아르키메데스', '뉴턴', '가우스' 를 꼽는다. 

어째서 3대 수학자에 끼지 못하는 지를 알 수가 없는 오일러.

바젤(Basel)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다음에 해에 가족이 근처의 리헨(Riechen) 으로 이사간다. 여기서 아버지가 칼뱅파의 목사로 일하게 되는데, 오일러의 아버지는 바젤 대학을 다닐 때에도, 야곱 베르누이의 지도로 수학을 공부하기도 해서 수학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오일러가 자신과 같은 목사의 길을 걷기를 바라면서도, 요한 베르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로 하는 다행스러운 실수(?)를 저질러 버리신다. 이 어린시절의 오일러의 종교 교육은 평생동안 영향을 끼쳤으며, 칼뱅주의를 절대적으로 고수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철저한 믿음이 후에 그가 눈이 먼 상황에서 용기를 주었지만, 오히려 볼테르나 프리드리히(프레데릭) 대왕 같은 사람과 어울리는 데는 어려웠다고 한다.

오일러는 성품이 매우 곧고 아버지께 잘 순종하는 성격이라서, 그대로 바젤 대학에 입학하여서 신학과 히브리어를 공부한다. 이 즈음에서, 요한 베르누이에게 매주 토요일 오후에 수학에 대한 개인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또 이 당시의 그의 수학 재능이 눈에 띄어서 다니엘 베르누이니콜라스 베르누이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722년에 바젤 대학에서 학사학위 를 받고, 1724년에는 데카르트뉴턴의 자연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 뒤에 아버지가 아이에게 수학은 그쯤하고 신학에 전념할 것을 강요했지만, 베르누이 가문의 사람들이 오일러가 리헨의 목사가 아니라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설득하자 아버지가 이에 양보하면서 오일러는 계속 수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된다.

1727년에는 요한 베르누이의 도움으로 바젤 대학 물리학 교수직을 지원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그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 과학원에 있던 다니엘니콜라스 형제가 오일러에게 편지를 보내서, 과학원의 의학부에 빈 자리가 있으니 이 분야를 공부해서 응모하라고 독촉하게 되고, 이에 오일러가 바젤 대학의 생리학과에 들어가서 의학강의를 들은 다음에 20세의 나이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과학원 의학부의 준회원이 된다. 초기 직함은 러시아 해군의 의무장교였다.

불행히도, 오일러가 도착하기 전 해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물에 빠져 죽게 된다. 게다가 오일러가 의학부에 들어온 첫 날에, 예카테리나 1세(표트르 대제의 부인)가 죽으면서 행정 개편 혼란으로, 의학부가 아닌 자연과학부에 들어가게 된다. 후에는 다니엘 베르누이가 바젤의 수학 교수가 되기 위해 1733년에 러시아를 떠나고 스위스로 돌아가면서 자리를 비우자, 그 뒤를 이어서 수학교수가 된다.
어쨋든 1727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왕립) 과학원의 수학 교수직으로 일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14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게 되고 1733년에는 위의 저 이유로 26세에 과학원에서 최고 수학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신의 여생을 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내기로 하고,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위스 화가 그셀(Gsell)의 딸인 카타리나(Catharina Gsell) 과 결혼한다. 이 러시아에서의 14년 간 초등 수학 및 고급 수학 교과서를 집필했고,


러시아 정부에서 요청한 많은 실용적인 문제들을 해결했으며, 수학교수로서의 직책뿐만 아니라 지리학과의 업무도 맡았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일곱다리 문제의 형식화와 풀이를 함으로써 그래프 이론의 효시를 이룬다. 물리학쪽으로는, 뉴턴의 동역학에 해석학을 체계적으로 적용할수 있음을 보여준 논문 '역학(Mechanica)' 을 집필한다. (자연계수 e의 경우, 이 전부터 존재 자체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여기서 오일러가 처음으로 표기한다고 한다.)

위의 시기에 거의 90편에 달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프랑스 과학원에서 해마다 수여하는 상을 적어도 12번은 수상했다고 하니 정말 평생 동안 연구만 하면서 사셨나보다. (1738년과 1740년에는 프랑스 과학원으로부터 대상까지 받게 된다.)


1741년에 러시아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강압적인 분위기로 바뀌자, 러시아를 떠나서 프로이센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사람들은 그래도 오일러를 매우 존경하였으며, 러시아를 떠난 뒤에도 약간의 월급을 보내줬다고 한다. 착한 성품은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 듯 하다. 그리고 그 해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베를린 과학원의 수학부분 책임자로서 25년을 일하게 된다. (오일러는 그래도 참 한 곳에서 오래 있는 스킬이 굉장한 것 같다.) 이 곳에서의 25년 동안에도 다방면으로 경이적인 업적을 쌓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수학을 장려해야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수학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주조, 수로, 운하, 연금제도 등의 실용적인 문제들을 수월하게 해결하는 오일러의 수학적 능력만은 인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베를린에서의 활동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나 보다. 오일러의 조용하고 순수한 성격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더 충성하려는 자들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사소한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수학적 외눈박이라고 오일러를 놀려댔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궁정 대신들이 오일러를 조소해도, 마음 좋게 받아 넘기면서 같이 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그의 대처가 프리드리히 눈에는 더 나쁘게 보였나 보다. 후에. 달랑베르(수학적으로는 오일러와 냉담한 관계이다.)가 과학원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는데, 그래도 달랑베르는 개인적인 편견을 같지 않고,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오일러 대신 다른 수학자로 대체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정직하게 말한다. 근데 이게 오일러와 프리드리히 대제의 사이를 결국 더 나쁘게 만들었나 보다.

아무튼 이런 불편한 프리드리히와의 관계 와중에서 1760년에 프로이센이 러시아 및 다른 나라들과 7년 전쟁을 시작한다. 이 때 프리드리히가 군대를 이끌고 잠시 원정을 나간 적이 있는데, 러시아가 이 사이에 프로이센을 침략해서 베를린을 함락시킨다. 이 당시에 베를린에서 6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역의 샬로텐부르크(Charlottenburg)에 있던 오일러의 농장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서 약탈당하게 되는데. 후에 농장 주인이 오일러임을 알게 된 러시아 장군은 그 즉시 완벽하게 변상하였다고 하며, 또한 이에 대해서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는 보상으로 오일러에게 4000 크라운을 보내준다. 프리드리히 궁정의 냉대와 다른 따뜻한 환대에 오일러는 다시 예카테리나 대제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176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남은 17년 동안을 76세로 죽을때까지 보내게 된다.)


7. 수학적 재능
오일러는 정말 온 생애를 통해서 비상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축복의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처음 100개의 소수를 다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제곱, 세제곱, 네제곱, 다섯, 여섯 제곱까지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 번 읽거나 들은 내용은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스' 라느 책을 읽은 다음에, 한 단어씩 암송 하면서 책의 각 쪽이 어느 단어로 시작해서 어느 단어로 끝나는지 까지 모두 지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억력만 좋은게 아니라 집중력 역시 엄청나서 조용하지도 않고 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을 때도 정신을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한손으로 달래고 다른 한손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기도 했다고 하며, 성품도 좋아서 계속해서 방해를 받아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1727년에는 프랑스 과학원이 '선박에서 돛대의 최적의 위치를 찾는 문제' 를 제시하는데, 오일러가 여기에 공모해서 2등을 하게 된다. 다만 이때까지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을 본 적조차 없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일화로서, 1785년 프랑스 과학원에서 발표한 '오일러에 대한 찬사'글을 보면, 오일러의 두 제자가 수렴하는 급수의 17째 항까지 지루하게 더하다가, 그 결과가 소수점 50번째 자리가 달랐는데, 스승이 대뜸 보고는 암산으로 계산한 다음 논쟁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8. 건강
오일러의 일생을 이야기 하다보면 빠질수 없는 것이 오일러의 눈에 대해서이다. 1735년에 러시아에 있을 때, 프랑스 과학원으로부터 천체 역학에 대한 문제를 접수 받는다. 다른 수학자들은 그 문제를 푸는데 여러 달이 걸렸지만, 오일러는 자신의 개선방법과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2박 3일만에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이 때의 과로로 인하여 매우 심한 열병을 앓다가 회복했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시력을 잃은 후에도 특유의 온화한 성격으로 "이제 좀 덜 산만하게 됐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후의 오일러의 초상화는 모두 오일러가 왼쪽을 본 채 오일러의 얼굴 절반만이 보이는 포즈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오일러의 눈 실명 때문이라고 한다.



베를린에 있다가 1766년에 러시아로 돌아갔을 때는, 나머지 눈에 백내장이 발병해서 완전히 눈이 멀게 된다. 아들이나 후배학자에게 받아쓰게 하거나 비서가 정서할 수 있도록 큰 석판에 분필로 공식들을 적는 방법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베토벤이 눈이 멀고도 창작을 계속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1771년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 제거 수술을 받아서, 짧은 시간 동안 시력을 회복했지만, 다시 재발해서 완전히 시력을  잃고 남은 12년의 인생을 눈이 먼 상태로 연구를 진행한다.


9. 업적(1)
신이 주신 엄청난 기억력과 집중력을 이용하여, 오일러는 수학과 물리학에 국한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대략만 나열해보아도 천문학, 의학, 식물학, 화학, 역사, 문학, 수학, 수리물리학, 역학, 공학, 기하학, 응용수학, 정수론, 약학에서 유체역학까지,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모두 완벽한 수학자였다고 한다.

평생 동안 약 500편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출판하였는데, 죽은 뒤에 출판까지 합치면 연구 목록이 약 886가지 항목이라고 하며, 현재까지 나온 오일러 전집은 75권정도이다. 생애를 통해서 쓴 논문 분량이 800여쪽이 되는 셈이다. 수학 역사상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논문에 대한 일화를 하나 보면,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그의 재능으로 인해 저녁식사하라는 말과 그걸 독촉하는 말 사이의 채 30분도 안되는 시간에 한 편의 수학 논문을 단숨에 쓰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오일러는 논문이 완성되면, 인쇄업자들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논문을 쓰면서, 논문 더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인쇄업자는 과학원 화보를 채우기 위해 논문이 필요하면 그 더미의 꼭대기에서 몇 다발을 집어갔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논문의 작성 날짜와 발표 날짜가 뒤바뀌는 일이 종종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1729년부터 상트 페테르부르크 과학원에서 출간한 글 전체의 약 절반이 오일러의 논문이었다고 하며, 심지어 오일러가 죽은 뒤에도 약 50년간은 1818년까지 화복의 각권에 통상 그의 논문이 하나씩 개재되었다고 한다. 베를린에 있던 시기에도 기가막히게 많이 만드셨나보다. 1746년부터 1771년까지 베를린 과학원의 전체 출판량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18세기 마지막 75년 동안 발표된 수학, 수리물리학, 역학, 공학에 대한 연구 논문의 3분의 1이 오일러의 논문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게다가 시력을 잃은 뒤에도, 그 폭발적인 생산력은 여전하여 오히려 1765년부터 발표한 연구 결과가 평생동안 발표한 것의 절반이라고 한다. 눈먼 동안에 약 400편 이상의 논문을 쓴 셈인데 이 중 대부분이 수학 교육을 받지 않는 비서가 대필한 것이라고 한다.

10. 업적(2)

대략 오일러가 관례화시킨 표현들을 조사해보면,

F(x) 의 함수 표기 

자연 로그 e 

삼각형의 변 : a, b, c 

삼각형의 둘레의 반 s 

삼각형 내접원의 반지름 r 

삼각형 외접원의 반지름 R

합의 기호 : Sigma 

lx (log) 

 허수 단위 i

 

 

 


또한 위의 기호중 6개를 이어주는  '4Rrs = abc' 도 오일러가 고안했다고 한다.
e^(ix) = cos(x) + i*sin(x) 를 이용하여, x=pi 일 경우에는 e^(i*ip) + 1 = 0 이라는 식을 표현하는데 이 식은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개의 수에 관한 관계식이라 하여 오일러가 가장 좋아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다룬 분야를 보면, 대학 기하학(한 삼각형에 대한 오일러 직선), 방정식론(4차 방정식을 푸는 오일러 해법), 미적분 : 베타함수, 감마함수)와 이 외에도, 위에 설명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영감을 얻은 한붓그리기 문제 / 체스판위의 나이트의 길과 관련된 문제 / 다면체의 꼭지점의 개수, 변의 개수, 면의 개수와의 관계식(v-e+f=2) / 달에 관한 이론, 조수간만 / 천체역학의 3입체 문제 등이 있다.

이렇게 열거해도 오일러의 업적의 반도 설명하지 못한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학계에서의 업적을 남겼는지 갸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오일러는 교재 집필에도 능숙했는데, 1748년 2권짜리 '무한소 해석(Introductio in analysin infinitorum)' 을 집필하였다. 이 책이 해석학의 주춧돌로 평가받는 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에서 최초로, 영어에 더 가까운 표현인, sin, cos, tag, cot, sec, cosec 등의 생략표현을 사용한다. (고대의 '원론'이 기하학에서의 주춧돌과 같다고 평가받으며 중세의 '알 자브르 바르 무카바라(Al-jabr wa'l muqabalah)가 대수학의 그것으로 평가받는다.)

1755년에는 '미분법(Institutiones caluli differentialis)' 1768-1774 년에는 3권 묶음으로, '적분법(Institutiones calculi integralis)' 를 집필한다.


11. 죽음

오일러가 76세였던 1783년 9월 18일(7일로 나와있는 자료도 있다.) 오전에 손자와 손녀에게 수학을 가르쳤고, 오후에는 풍선의 낙하법칙을 연구했다고 한다. 렉셀(Lexel) 가족을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한 후, 잠시 뒤에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한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잠시 뒤 손자와 장난 치면서 차를 마시다가 발작을 일으키고 명을 달리한다. 담뱃대를 손에서 떨어트리면서 "나는 죽는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는 그날 까지도 연구를 계속한 셈이다.


12. 평가

오일러에 대한 많은 찬사들이 있지만 몇개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비할 바 없는 오일러, 모든 수학자 중의 왕자" (스승인 요한 베르누이)
"비유할 필요도 없고, 과장할 필요도 없이, 오일러는 해석학의 화신이다. 사람들이 호흡하듯이, 독수리가 공중을 날듯이, 오일러는 특별이 힘들이지 않고 계산을 했다. " (아라고, 프랑스의 물리학자 & 천문학자)
"현대적인 수학적 사고의 완전한 형태가 오일러에 의해 창조됬다고 해도 무방하다. 오일러 직전의 수학자들이 쓴 글은 매우 읽기가 어려운데, 공식들을 설명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을 최초로 알려준 사람이 오일러였다." (루디오, 독일의 수학자)
"현재(18세기)의 뛰어난 수학자들은 모두 오일러의 제자이다. 그의 연구 결과를 공부하지 않은 수학자는 없으며, 그로부터 공식과 방법을 얻지 않은 수학자는 없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 그의 천재성을 빌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콩도르세)

18세기가 '오일러의 시대'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수학자인 오일러. 그 전에 조사했던 비운의 천재 갈루아처럼 수학계에는 운이 참 없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 오일러는 그래도 특별히 인생의 고난 같은 것을 많이 겪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 공부만을 평생토록 한 행복한 수학자라고 볼수 있다. 갈루아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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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자리에나 앉으십시오. 당신이 선택한 자리는 그대로 오늘의 '영예의 자리' 가 될 것입니다."
(다쉬코프 공주가 자신의 취임식날, 오일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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