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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추구하는 광인들

데카르트 - 8번째 수학자

by bluefriday 2012.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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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한 수학자들을 조사하다보니 계속해서 데카르트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데카르트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수학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데카르트. 다른 많은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을 제외한 많은다른 분야도 다루었는데, 요 사이의 개인적인 고민 문제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어서 수학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조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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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1. 이름 :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2. 출생 : 1596.3.31 ~ 1650.2.11
3. 국적 : 프랑스
4. 고향 : 프랑스 투렌(Touraine) 지방의 라 에이(La Haye).
5. 직업 : 철학자, 수학자, 군인, 과학자.

6. 일생

데카르트는 라 에이 지방에서 변호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데카르트를 낳고 며칠 후에 죽게 되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데카르트 또한 위기를 겪었으나 다행히도 살아남는다. 물론 어머니와 같은 결핵 징후를 보이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도 계소해서 창백하고 마른 아이였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가면, 데카르트에게는 형과 누나,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하며 얻은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좋지 않은 몸으로 인하여 어린시절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자신을 돌봐주던 간호사와 사팔뜨기 소녀 친구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후에 시간이 지난 뒤에도, 데카르트는 이 두 사람(간호사, 소녀친구)에게 놀랄 만한 정도의 충실함과 헌신을 보였으며 심지어 유산을 얻었을 때에도 간호사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자신의 일생동안 소녀친구와도 우정을 돈독히하며 지냈다고 한다.

변호사 집안의 귀족 가문이라는 출생 환경으로 인하여, 데카르트는 평생동안 돈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자랐는데 8살이 되던 해(10살라는 자료도 있다.)에 라플레시에 있는 예수회 학교(Jesuit College)에 입학한다. 여기서 8년을 공부하게 되는데, 몸이 좋지 않은 데카르트를 위해서 예수회 신부 샤를레(Charlet)는 건강에 대한 처우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특별히 예외 규칙을 주어서 아침 기상시간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도 좋다고 허락해주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늦은 시간까지 자리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준다.

이 샤를레 신부의 예외 대우로 인한 데카르트의 생활 습관은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데카르트는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 수면 습관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아침에 잠을 깨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명상과 사색을 했는데 후에 그는 자신의 이런 아침 명상시간이 매우 생산적인 시간이었으며 철학과 수학 연구에 밑바탕이 되는 많은 사고들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후에 그가 파스칼을 만나게 됬을 때 건강으로 고생하는 파스칼에게도 자신의 이런 방식을 적용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하는데 파스칼이 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1612년에 라플레시에 있는 예수회 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는 푸아티에(Poitier)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 나서 1616년에 브레다(Breda)에 있는 군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전쟁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수학도의 입장에서 이렇게 자료를 조사하면서 내릴수 있는 판단으로는, 총과 칼로 사람들과 싸우는 피 흘리는 전쟁을 좋아했다고 보기보다는 그냥 전략과 전술을 좋아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심지어는 자기가 어느 군대와 싸우는지도 모르고 아무 군대나 지원했다는 말도 있는데, 일단 어쨋든 그는 1617년 네덜란드 마우리츠 공의 육군에 입대해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군 생활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기사도 정신이 투철했다고 한다. 한번은 자신의 애인에게 무례하게 군 주정뱅이에게 기사도의 방식으로 잔뜩 혼을 내줬다고 하는 일화도 전해지며, 자신의 조각배에 침입한 적의 칼을 빼앗아서 위험을 넘겼다는 자료도 있었다.

수학자를 조사하면서 많은 수학자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경력이 군인인 수학자도 이렇게 있었다니 이런 천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군생활을 마친 다음에는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1620년 유럽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데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보헤미아, 헝가리 등등 약 8년간(~1628)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쌓는다. 그 와중에 1623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메르센과 만나게 되고, 1625년에는 파리에 잠시 정착해서 수학연구와 철학공부를 하면서 광학기기의 제작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628년 여행을 끝내고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20년 동안 수학과 철학, 과학 저술에 전념하면서 인생의 절정기에 도달한다.

이 기간 동안에도 베크만, 호르텐시우스, 호이겐스, 메르센 등과 계속해서 교류했다고 한다.

베크만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보면, 베크만(Isaac Beeckman)은 도르트(Dort) 지방의 더치 대학(Dutch College)의 학장으로 있을 때, 데카르트가 마우리츠 공의 육군 신분으로 군대가 주둔하던 브레다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거리에는 네덜란드 어로 쓰인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는데 수학 경진대회 문제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데카르트가 지나가는 베크만을 보면서, 저 내용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하였고 베크만은 만약 당신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데카르트가 이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는 
베크만이 번역해 준 어려운 기하학 문제를 몇 시간만에 풀어내는데 이로써 베크만과 깊은 우정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베크만이 데카르트에게 줬던 영향을 실로 대단했나보다. 데카르트는 "베크만은 내가 연구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아버지였다" 라고 말했으며, 또한 "나는 자고 있었고, 당신이 나를 깨웠다" 라고 까지 말을 하는 걸 보면 데카르트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1637년 데카르트는 보편 과학에 관한 그 유명한. '방법서설'을 저술한다. 이 방법서설은 3개의 부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부록은 각각 '광학', '기상학', '기하학' 이었다고 한다. 광학에서는 굴절 법칙에 대하여 다루고 있고, 기상학에서는 무지개가 생기는 이유 등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하는데 3번째 부록인 '기하학(La gemetrie)'은 해석기하학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자. 그는 기하학의 발전에 매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해석기하학을 통하여 점과 수식을 하나로 보게 되어 기하와 대수가 통합되는 시발점을 마련한다. 유클리드 이후로는 기하학 분야에서 거의 진전이 없었는데 이 해석기하학의 완성을 통하여 그 동안 동양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수학과 천문학을, 서양이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해석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모든 규칙을 적용시킬수 있는 호환성까지 가지고 있다. 후에 이 분야는 오일러, 베르누이 형제, 라그랑주, 라플라스 등에 의해서 널리 응용되어 진다.

데카르트는 1649년에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로부터 스웨덴 궁정으로 와서 지식을 전파하고 자신에게 철학을 전파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자신을 위해 특별히 파견된 군함에 탄복해서였는지 평소에 자신이 생활하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인 네덜란드의 생활을 버리고 스톡홀롬으로 떠난다. 근데 이 크리스티나 여왕이 거의 운동선수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새벽 5시에 추운 도서관의 문을 활짝 열여 놓고, 여명이 밝지도 않은 시간에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간과 장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데카르트도 이를 위하여 평소의 자신의 수면 습관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추운 공기속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피로에 지친 끝에 결국 3개월 뒤에 폐렴을 동반한 열병을 앓게 되고 10일 뒤인 1650년 2월 11일에 사망한다.

그래서 이 천재 수학자의 유골까지도 스톡홀롬에 묻히게 되는데. 후에 17년이나 지나고 크리스티나 여제가 왕권을 포기한 후에야 프랑스로 그의 유골이 돌아오게 된다. 판테온(Pantheon)에 안장되는데 심지어 그의 오른팔은 중간에 프랑스 재무상이 기념품으로 빼돌렸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서 야코비는 "때로는 위대한 사람들의 유골을 소유하는 것이, 그들이 살아있던 동안에 그들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편할때가 있다." 라고 말하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사자로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7. 업적.
데카르트의 업적이야 다른 분야를 모두 망라한다면 매우 많겠지만 여기서는 수학적인 업적만 알아보자.  먼저 방법서설에서, 알파벳의 처음 글자(a,b,c)들로 기지의 양(상수)들을 표시하고 마지막 글자(x,y,z)들로 미지의 양(변수)를 표시하는 지금의 관행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또 지수 표현의 경우도 데카르트가 처음 만든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데카르트가 사용한 후부터 지금처럼 정착되었다고 한다. 또한 음수의 개념을 구체화해서 음수를 좌표계에 표시하게 된다. 이미 22살에 좌표평면을 만든 것 또한 유명하다.


하나의 설이지만, 침대에 누워있다가 천장을 돌아다니는 파리를 보면서 평면 좌표계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지금 중,고등학교 때 배우는 평면 기하학의 시작을 만든 수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우주론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1633년에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관점에서 우주론과 물리학을 다룬 책인 '우주론(Le monde)'를 완성하는데 출판하려다가,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포기한다. 그러다가 11년이나 더 지나서야, 이론을 다시 가다듬어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발간한다.

8. 평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중략)..데카르트가 침대에 누우 좌표기하학의 방법을 창안했던 그 아침은 대단히 뜻 깊은 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밀(John Stuart Mill)
(해석기하학은) 데카르트의 다른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사색보다도 그의 이름을 불후하게 만들었고, 정밀과학으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첫 걸음이 됐다."

토마스 하비즈(Thomas Hobbes)
"데카르트는 그가 쓴 모든 것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믿지 않았고, 단지 그리스도를 칭찬하는 것."
"데카르트가 수학에만 집중하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는 수학에서는 기하학에만. 관심을 가져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하학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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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방법 서설은 과학 전반에 대해 좋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한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거나 빌려서라도 읽어 봐야겠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우리의 힘으로 결정할 수 없을 때, 가장 그럴듯한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매우 확실한 진리이다." (by 르네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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