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으로 어떤 수학자를 조사할까 싶다가 공업 수학과 수치 해석 수업 때문에 문득 푸리에가 생각이 났다.
자료를 좀 찾아보려고 중앙 도서관에 왔는데, 푸리에가 그렇게 메이저급 수학자가 아니었나보다. 자료가 생각보다 적었다. 나오는 건 전부다 푸리에 급수 및 변환 뿐이지만 그래도 뒤져보니 몇 권은 나와서 다행이다.
1. 이름 : Jean Baptiste Joseph Fourier
2. 출생 : 1768.3.21 ~ 1830.5.16 (63세 심장병으로 사망)
3. 가족관계 : 재단사인 아버지의 첫째 부인에게서 3명, 둘째 부인에게서 12명의 자녀. 푸리에는 둘째 부인의 자녀중 9번째로 태어남.
4. 국적 : 프랑스
5. 직업 & 직위 : 수학자, 혁명가, 행정학자(도지사?), 물리학자, 군인, 교사, 남작, 백작.
위에 열거한 많은 직업에서 알 수 있듯이 재능이 많아서인지 푸리에의 일생도 다사다난하다. 형제 자매가 많았던 집안이지만 8살 때 고아가 된 뒤에 지인의 도움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이곳에서 수학과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된다.
푸리에는 사관학교를 다니다가,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베네트회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곳에서도 수학 공부를 계속 했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자유의 몸이 되고서, 수도원을 나오자마자 고향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자료에 따르면 수도원을 마치고 교사로 일하기 전인 21살때, 파리에 가서 '수치 방정식의 근사해를 계산하는 방법' 을 논한 논문을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다고 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푸리에의 정의에 관한 발상을 떠올렸다는 말도 있다.)
1794년까지 이어진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푸리에는 혁명 위원회의 일원으로 상당히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권투하는 피타고라스에 한번 놀랐는데 이분도 참 특이하시다.) 로베스 피에르에 의한 공포 정치의 희생자들을 옹호하다가 감옥에 갖혔는데 후에 정작 로베스 피에르 본인이 단두대에서 처형 당한 뒤에 석방된다. 석방 후에, 1798년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따라나서기 전까지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콜 폴리테크니크 등의 학교를 거치며 수학 공부를 하였는데, 이때 라플라스, 라그랑주, 몽주 등을 만났다고 한다.
1798년에 푸리에는 문화관계 업무의 일원으로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로 종군한다. 1년후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돌아오지만 푸리에는 그 곳에 남아서 수학과 고고학을 연구하면서 군수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2년 뒤에 프랑스로 귀국했을 때, 나폴레옹은 푸리에의 뛰어난 행정능력에 감동해서 이제르 지방의 지사로 임명한다.
37개 지역 사회의 동의를 얻어서, 늪지대에 배수시설을 설치하여 이를 값싼 농경지로 바꾸었고 학교 교육제도를 개혁했으며, 도로 건설 계획 등의 추진으로 인해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작의 칭호를 받게 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 <고체에서 열의 전도에 대해> 라는 논문을 1807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한다. 푸리에 본인에게는 조금 서운하게도, 예전에 같이 알고 지낸 라그랑주, 라플라스, 르장드르 등이 이를 심사했는데 논문이 엄밀성이 결여됬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만다. 삼각함수를 이용한 함수의 표현에 반대했다고 한다.
후에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루이 18세가 정권을 잡게 되자, 푸리에는 나폴레옹을 배반하고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 뒤에 다시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고 진격해오자 다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는데 이번엔 나폴레옹이 백작의 지위를 주고 론 지방의 지사로 임명한다. 또 다시 루이 18세가 부활해서 왕정이 복고되자 루이 18세는 푸리에를 공직에서 추방하는데 이후로 가난한 삶을 살다가 옛 교사 당시 제자의 도움으로 통계국 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깊은 연구는 수학적인 발견에 대한 가장 풍성한 공급원이다." (푸리에 백작)
1817년에 프랑스 과학원의 회원으로 선임되고 1822년에는 수학분야의 서기가 되는데 이 때의 권한으로 그 해에 <열의 해석적 이론> 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거의 모든 함수가 삼각함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다. 여기에 대해서 '절대온도'의 개념으로 유명한 캘빈 경은 "위대한 수학적인 시" 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푸리에는 열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는데 우연일수도 있지만 그래서인지 열에 대한 기벽이 있었다고 한다. 사막의 열기가 건강에 가장 좋은 조건이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겉옷을 여러 겹 껴입었으며 일반인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온도의 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후에 심장병으로 죽을 때도 완전히 열에 구워진 상태였다고 한다. (혹자들은 이런 열의 기벽과 강박관념이 심장병을 유발했을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위에 표현한 것처럼 정말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쓰이는 적분기호는 푸리에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하며, 푸리에 급수는 적분 개념의 재검토, 칸토어의 집합론, 분포 함수, 균등 연속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공업 수학에서 배운 '푸리에 급수'나 '푸리에 변환' 정도로는 푸리에의 영향력을 완벽히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연구 성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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