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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추구하는 광인들

갈루아 - 4번째 수학자

by bluefriday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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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 에바리스트 갈루아 (Evariste Galois)
2. 출생 : 1811.10.25 ~ 1832.5.31
3. 국적 : 프랑스
4. 고향 : 파리 근처의 작은 마을 브루 라 레누(브루라렌 : Bourg-la-Reine)
5. 가족 : 아버지는 공립학교 교장(계몽사상에 심취)이자 문학가(Nicholas-Gabriel Galois), 어머니는 파리 대학 법학부 교수의 딸(Adelaide-Marie Demante)


 
군이론의 창시자이자, 고차방정식의 일반해를 찾는 방법을 고안한 갈루아. 수학사의 불운한 천재인 갈루아는 12살까지 자유주의자인 아버지와 금욕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누이, 남동생과 함께 밝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주로 총명한 어머니께서 교육을 담당하셨는데, 이때 그리스어나 라틴어등에 대해서 공부하게 된다.
 
12살(1823년)에는 명문 루이르그랑 리세 (Louis-le-Grand : lycee : 당시 국립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당시에는 6년제로 중, 고등학교 기숙사학교였다고 한다. 로베스 피에르가 졸업해서 좀 논란이 되었던 학교라고도 한다.) 여하튼 이 곳에서, 라틴어 최우수상, 그리스어 우등상으로 진학하게 된다.
 
14살 무렵에 학교 당국의 각종 기만 등에 환멸을 느끼고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데 15살에는 낙제까지 하게 되고 결국 유급해서 3학년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이 당시에 르장드르가 서술한 '기하학의 기초' 라는 책을 읽게 된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갈루아에 대한 평을 들어보면
 
"수학에 대한 광기가 이 소년을 사로잡았다. 학교에서는 시간을 낭비하고 선생을 괴롭히며, 이로인해 끊임없이 꾸중을 듣게 되었다"
"독창적이지만 아주 엉뚱한 토론을 좋아하는 학생"
"자랑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자부심을 가진 학생이다."
 
갈루아를 지켜본 선생님들이 하신 평가인데 실제로 특이하긴 특이했나보다. 낙제로 인한 좌절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만한 우월감까지 생겨서 친구가 없는 외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6살(1827년) 때엔 베르니에(M. Verier) 교사로부터 최초로 수학강의를 들으면서 수학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때 라그랑주의 '수치방정식의 해법' 을 읽으면서 5차 방정식의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라는 곳으로 진학하길 원해서 입학시험을 보게 된다.
 
* 에콜 폴리테크니크 : 나폴레옹의 부국강병을 위한 정책 중 하나로 설립된 엘리트 학교. 2번 이상 입학시험에 낙방하면 다시는 입학시험을 볼 수 없는 곳이다. 후에 나폴레옹이 군사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되자,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이 학교의 학생들이 자원입대를 신청했는데. 나폴레옹이 "황금알을 낳는 닭을 어찌 전쟁터로 보낼 수 있겠느냐" 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갈루아는 시험에 낙방하게 된다. 낙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갈루아가 성격이 워낙에 오만하고 괴팍해서 심사위원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이것도 문제라고 제출하냐면서 칠판지우개를 심사위원에게 던졌다는 표현도 나온다.) 어렸을 적부터 편협하게만 공부해서 기초지식 쪽으로는 약했을 거라는 말도 있고, 애초에 그냥 심사위원이 좀 무례했을 거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1828년에 아무 준비 없이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 시험을 치르고 낙방한 후에는, 수학 교사가 되려는 생각은 포기하고 자신의 발상에 따라 독자적으로 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래서 에르미트를 길러낸, 실력있는 수학선생인 루이 리샤르의 학급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리샤르는 갈루아의 재능을 알아보고 많은 격려를 해줬다고 한다. 해서 1년 뒤인 1829년 4월에는 '순환 연분수에 관한 정리의 증명' 이라는 논문을 쓰게 되는데, 이 논문에 감동한 리샤르가 이걸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해보라고해서 투고한다. 그런데 이 논문을 당시 아카데미 심사위원인 대수학자 코시가 잃어버린다.
 
*코시 :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 당시 프랑스 수학계의 최고 권위자. 가톨리 교도이자 왕당파의 보수주의자. 자신은 독창적이었지만 젊은이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갈루아의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 소수파의 모의로 인하여 신경쇠약으로 자살하게 되는데 갈루아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이 방황했을지가 느껴진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을 다시한번 보는데, 이번에도 위와 같은 식의 이유들로 인해서 낙방하게 된다. (아마 이번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동요도 작용했을거라 생각한다.) 결국은 에콜 폴리테크니크보다 한참 낮은 대학인 에콜 노르말에 입학하게 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2번 낙방하면 입학시험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1830년 2월 다시 용기를 내서 코시가 예전에 잃어버린 논문을 정리하여 '거듭제곱근으로 풀 수 있는 방정식의 조건에 대해' 라는 노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 한다. 지금의 평가로 봤을 때, 이 논문은 당시 수학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으로 수학 대상을 받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아카데미의 간사였던 대수학자 푸리에가 심사를 위해 자택으로 가지고 갔다가 들여다 볼 새도 없이 지병인 심장병으로 병사한다. 게다가 푸리에가 죽은 이후에 심사 논문까지 사라졌다고 한다.
 
 
갈루아는 이 무렵부터 분명한 정치적인 주장을 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혁명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공화제를 수립하려던 그런 급진적인 정치모임등에도 참가(근데 갈루아 자신의 집안은, 자유주의의 신봉자로 상위 1퍼센트에 포함되어 있는 가문인데..)하는 등, 학교 신문에 교장의 기만을 고발하는 글을 쓰다 걸려서 퇴학 당한다. (친구들이 증언해줄거라 믿었지만, 교장의 협박에 친구들이 거짓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831년 1월, 그러니까 19살 때 다시 잃어버린 논문을 작성하여 '방정식의 모든 해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과학 아카데미에 논문을 제출하게 된다. 이 3번째 논문이 흔히 현재 '갈루아 이론' 으로 알려진 논문이다. 당시 심사위원은 응용수학자인 포아송이었는데 결과가 몇 개월이 지나도 안나오고 재촉해도 답변도 못들었다고 한다. 논문은 기다려도 결과가 안 나오고 당시 자신의 정치모임 단체가 불법단체로 규정되자 지하활동을 했는데 1831년 3월 9일 체포된다. 후에 친구들과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죄로 풀려나지만 또 그 해 7월 14일에 또 체포된다.
 
여기에서 갈루아는 식물학자로 유명한, 나중에 정치가가 된 공화주의자 라스파유를 만나게 된다.
 
"그는 소심하지만 위엄 있는 사람이다. 과학공부를 한 기간이 3년 밖에 안되지만, 마치 60년 넘게 깊은 사색을 한 사람처럼 얼굴은 주름살로 가득하다. 그를 살려야한다. 앞으로 2년후가 되면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분명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깊은 사색에 빠져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마치 사색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갈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갈루아는 내게 '선생님은 저의 부족한 점을 알고 있습니까? 선생님한테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겐 마음속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제 곁엔 아무도 없군요" 라고 말했다."
 
위에는 라스파유가 본 갈루아의 모습이다. 마지막 말은 애처롭기도 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집안이 자유주의자 상위 1퍼센트 가문인데도 자신이 공화주의자가 되서인지 어머니와도 의절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옥중에 있는 갈룽에게 면회도 한 번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뭐 어이없게 수감중에서야,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회신을 받게 되는데 사실 이것도 에콜 노르말 1학년 때 유일한 친구였던 오거스트 슈발리가 '지구' 라는 신문에, 천재수학자 갈루아가 어떻게 논문이 2번이나 아카데미에 의해서 무시됬고, 3번째 요청이 답변도 오지 않는다고 책임자 실명까지 거론하며 공개했기 때문에 겨우 진척된 논문 심사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논문은 기각된다.


"갈루아씨의 증명을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추론은 만족할만큼 분명하지 않으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귀하가 투고한 이 논문은 풍부하게 응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이론의 일부로 보입니다. 따라서 귀하께서 보다 완전한 공모를 공표하기 전까지
우리들의 의견은 공백으로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후에 이 논문이 인정받게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

 
1832년 3월에는 인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유럽으로 전파된다. 이 콜레라가 파리에 유행하자, 가석방된 갈루아(갈루아가 콜레라에 걸렸다는 설도 있는데 정확하진 않다.)는 한 달 정도 형기를 남긴 채 이웃한 요양소로 옮겨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의 생애에서 유일한 연애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요양소 딸인 스테파니(Stephanie-Felice du Motel)이다. 연애 경험이 없던 갈루아의 성급한 구애에 스테파니는
 
"아무 일도 없었을 때처럼 당신을 대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갈루아는 정말 항상 불행한 사람이었나.
 
"이 한달 동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복의 샘물이 모두 말라버렸고, 내 인생은 행복도 희망도 없는 말라 비틀어진 몸처럼 되어버렸다. 어떻게 내 자신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1832년 5월 30일에 갈루아는 스테파니의 약혼자로부터 도전장을 받고서 결투를 하게 된다. 이 당시에는 이런 식의 결투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파리의 신문에서는 '그날의 결투' 라는 란 까지 있었다고 하니. 이 결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대체적으로는 갈루아를 없애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모략이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스테파니가 경찰의 스파이였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약혼자와의 결투까지 모든 것이 다 정치적 계략이었다는 말도 있다. (뒤에 갈루아의 전기 '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Whom the Gods Love?)' 를 쓴 레오폴드 인펠드(Leopold Infeld) 는 결투를 비롯한 모든 정황이 경찰에 의해 조작된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아무튼 결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갈루아는 3통의 편지를 쓰게 된다.
 
한 통은 "모든 공화주의자에게" 로 시작되는 편지로 아마 내용은 조금 사상적이었을 것 같다.
 
또 한통은 공화주의자였던 두 동료에게 보낸다.
"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도전을 받았고, 그 도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이에게 알리지 말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본의 아니게 싸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해달라는 것이다."
 
마지막 한통은 유일한 친구인 슈발리에에게 보낸다.
"수치스럽게도 바람둥이 여자의 희생물로서 나는 죽는다. 내 생활은 비참한 중상모략의 한조각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 나는 도대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 그렇게 치사한 것 때문에 죽어야 한단 말인가."
 
또 이 마지막 편지에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나는 해석 분야에서 몇 가지 새로운 성과를 올렸다. 그 가운데 방정식론과 기타 적분함수에 관한것이 있다. 이 정리가 옳은지에 대해서,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야코비나 가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물어보길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여기에 씌어진 몇 가지 알기 어려운 문장을 해독해서 이익을 얻는 사람도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1832년 5월 29일 에바리스트 갈루아"
 
편지를 다 쓴 갈루아는 그라시에르의 정원에서 단총 결투를 하게 됬는데, 25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상대방의 총탄으로 배를 관통당하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뒤에 울면서 따라온 동생에게
 
"울지마, 스무살에 죽는다는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일이다." 라고 오히려 위로해줬다고 한다.
 
다음날 복막염으로 절명한다.
 
약 3천명 가까운 참례자들이 모인 가운데, 몽파르나스의 어느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 정치적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위치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정말 비운의 수학자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슬픈 수학자 갈루아. 수학계에 전해지는 말 중에
 
"아벨은 가난해서 죽었고, 갈루아는 세상의 바보들이 죽였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안타까운 수학자다. 자기 인생 다 누리고 산 오일러나 가우스를 생각해보면 정말 더 안타까운 부분이다. 


갈루아가 죽기 며칠전에 쓴 글을 아래와 같이 남긴다.

 
"좋은 일을 하도록... 그러나 그것을 결코 경험하지는 않도록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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