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류의 첫째'
수학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수.도. 있었던 사람.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에는 수학문제를 풀며 고통을 잊었던 사람.
영원한 행복의 가치는 무한하기 때문에, 비록 행복을 보장하는 종교적인 삶의 확률이
매우 낮더라도 그 기대값은 종교적인 삶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
엄청난 수학적 재능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좀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훨씬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갈루아와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비운의 수학자.
1. 이름 :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2. 국적 : 프랑스
3. 출생 : 1623.6.19 ~ 1662.8.19
4. 직업 :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5. 가족 :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 누이 질베르테(Gilberte), 여동생 자클린(Jacqueline).
6. 고향 : 프랑스의 오베르뉴의 클레르몽 (Clermont)
7. 일생
1623년 클레르몽에서 태어난 파스칼의 아버지 에티앙(Etienne)은 야망 있고, 세속적이고 지성을 겸비한 귀족 계급이었다. 파스칼의 남매들은 3살 때 어머니를 잃게 되는데,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진보적인 교육으로 유명한 파리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가게 된다. 아버지의 교육관념이 좀 특이하셨는지 아니면 투철하셨는지, 파리로 이사오기 전까지 아이들이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고 아버지와 약간의 가정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기들이 공부해야 할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기 전까지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뭔가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져서 배움의 길로 인도하게 하려고 하셨다. (하지만. 이로 인해, 12살때까지 파스칼 남매들이 언어를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또 파스칼의 아버지는 문학이나 언어 등을 중요시여겨, 수학은 15살 이후부터 공부하라고 말해줬다는데 기록에는 12살 때부터 파스칼이 혼자 몰래 수학 공부를 하면서 기하학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어느날 파스칼이 마루의 타일에다 혼자 표와 그림을 그리며 노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이에 기뻐하며, 파스칼이 소화해 낼수 있는 범위에 한해서, 문법, 라틴어, 수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당시에 파스칼은, 자기 혼자 유클리드의 23가지 (혹은 32가지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공리를 터득한다든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 라는 것을 알아내는 등의 천재성을 이미 보였는데, 이 열정에 감탄한 아버지가 유클리드의 원론 사본을 사주셨다고 한다.
잠시 이야기가 새는 것 같지만. 파스칼의 인생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스칼의 동생인 자클린에 대해서 알아보면, 자클린 역시 파스칼과는 조금 방향이 다르지만 문학에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자클린의 시는 왕궁의 주목을 받을 정도였으며 여왕이 사랑하여 자주 자클린과 그의 가족들을 성으로 초대하였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파스칼은 14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서 메르센느(메르셍) 회합에 참여했는데 여기에서 페르마, 가상디 등을 만났다고 한다. (후에 파스칼은 페르마와 함께 확률론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 메르센느 회합 : 종교적 목적을 가진 모임. 파리에 있는 메르센느의 방에서 이뤄진 모임으로써 1666년에 프랑스 과학원으로 발전한다.
15살 때는 파스칼의 아버지가, 공납금 문제로 정부와 관계가 불편해지는 바람에, 아이들을 남겨둔 채 파리를 떠난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아버지가 떠난 뒤에 여동생 자클린이 천연두에 걸리게 되는데 (물론 이 때문에 아버지가 몰래 다시 돌아와서 자클린을 간호하고 다시 도망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천연두로 얼굴을 다침에도 불구하고, 자클린은 신에게 감사하는 낙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그녀의 시에 대한 인기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자클린은 자신의 이 인기를 아버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사용한다.
파스칼이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꺼려하는 추기경 리체리우(Richelieu)가 자클린을 무릎에 올려놓고 칭찬하자 그녀는 울음을 터트린다. 이에 추기경이 난처해져서 아버지에 대한 죄를 용서해주고 파리로 돌아오게 한 후에, 노르망디 지역의 세금 감독원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1639년(파스칼 16세) 파스칼은 메르센느 회합에서 원추곡선의 기하학에 대해서 발표하게 되는데 이 논문에 '파스칼의 육각형(Pascal's Mystic Hexagon)'을 포함한 사영기하학 정리를 수록한다. 아마도 아폴로니우스 이후로 누구도 진행하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서 더 발전시킨 것을 믿을 수 없어서였을까 데카르트가 이 논문을 보고 엄청나게 감동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에 파스칼 집안은 아버지가 세무원으로 있는 루앙으로 정착하게 되고, 파스칼은 세금징수원인 아버지의 업무의 일부분인 세금표 합산을 도와주다가 이게 너무 지루했던지 계산을 쉽게 할 수 있는 계산기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아마 이 때가 파스칼이 기하학을 포기하고, 좀 더 실용적인 연구에 몰입하게 된 시기였다고 추측된다.)
다음 해에는 첫 번째 정식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원추곡선론(Essay on Conic Sections)' 을 출판하게 되고 2년 뒤인 1642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를 발명하게 된다. 일명 파스칼리느(Pascaline). 이게 1940년대의 계산기와 그 구조가 흡사했다고 한다. 일단 기록으로는 기계로 된 계산기를 세계에서 3번째로 만든 것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이제 파스칼의 생활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사건이 생기는데, 루앙에서의 생활 중에 아버지가 넘어져서 엉덩이를 다쳤는데, 이를 위한 두명의 접골사가 집에 치료를 위해서 머물게 된다. 근데 이 두명의 접골사가 얀센(Jansen)교라 불리는 광적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 종교에 대해서 깊이 알아보진 않았지만. 절대적이고 극단적이고 완고함만이 수 천의 잃어버린 교회와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파스칼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한다. 파스칼은 원래 가톨릭 신자였는데 23세의 나이로 두명의 얀센교도 광신교 접골사들의 자극으로 열광적인 종교인이 된다. 아마도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관념적인 질문을 답해주는 그리고 어떤 과학도 물어볼 수 없는 그런 위대한 개념을 안고 있는 종교로서 인식했나보다.
개종 후에 파스칼이 얼마나 열광적으로 얀센교의 주장과 생각이 다른 수도사들을 박해했는지 이 개종자 파스칼이 열정 넘치는 신앙으로 싸움을 거는데 워낙에 화술이 능해서 심지어 수세에 몰린 수도사들은 '자신이 만약 파스칼의 주장이 죄가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불에 타도 살아남을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근데 몇 달후 다시 종교적 열정이 수그러들고 과학적 실험이 시작된다. 이 때는 진공의 존재성에 대해서 연구하는데 사실 파스칼은 18살을 고비로 몸 상태가 늘 병약해있었다. 어떨 때는 허리 아래부분의 마비로 목숨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을 겨우 삼킬 수 있었고, 심한 두통에 시달릴 때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파스칼이 24살 때 누이 자클린과 함께 의술이 상대적으로 발달한 파리로 가게 된다. 데카르트는 병상에 누워있던 파스칼에게 찾아가서 몇 가지 의학적인 조언을 해주면서 진공 이론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파스칼이 건강이 좋아져서, 진공에 대한 발표를 했을 때는 자신의 생각을 훔쳤다며 파스칼을 제소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1654년 30살 때 뉘일리(Neuilly)에서 마차를 타고 가다가, 다리가 높은 난간에 부딪혀 죽을 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자신의 수학적 활동이 신을 즐겁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종교적인 명상으로 되돌아가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말년에는 영혼(종교)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 중 영혼의 세계를 선택해서 다시 수학을 멀리하게 된다. 파리 근교에 있는 포트-로얄 수녀원과 가깝게 지내면서, 근처의 학교를 위한 교과서를 쓰거나 가진 돈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생계를 위해서 구걸하거나 빌리는 등의 생활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가시가 달린 쇠붙이 벨트를 착용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줬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딱 한번 더 수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데 이때 사이클로이드(cycloid)로 알려진 곡선에 대해서 연구하게 된다.
*사이클로이드(cycloid) : 원이 구를 때, 원 위의 한점에 의해 만들어지는 호. 많은 희귀한 성질 때문에 몇가지 전형적인 문제에서도 등장하는. 수학의 가장 아름다운 곡선 중 하나이다. 또한 그 매력적인 성질 때문에 많은 분쟁을 일으켜서 '기하학의 헬레네', '분쟁의 씨앗(The apple of discord)' 라고도 불리고 있다.
1661년에는 누이인 자크릴이 죽게 되는데, 이로 인한 상심이었을까 그 다음해에 아픈 몸에 덮친 격으로 자신도 병에 걸리게 된다. 이 때 파스칼은 "병은 기독교인에게 당연한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는 가난한 자들 앞에서 죽을 수 있도록 불치병 환자를 위한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결국 1662년 8월 19일 새벽 1시에 39세의 나이로 "신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라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나고 만다. 부검이 실시 되었지만 죽음의 원인 조차 미상이었고 심지어 그 동안 아파왔던 이유조차도 미상이었다. 복부동공의 폐결핵에서부터 납 중독, 소화불량으로 인한 뇌연화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원인에 대한 추측만 무성했다고 한다.
8. 또 다른 면
파스칼은 필명(Lovis de Montalte, Amos Dettonville)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팡세(Pensees)(파스칼의 명상록)'로 인해 말년에 문학적인 면에서도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이 책은 인간, 신, 인생 등에 관한 사상과 감정의 문집이라고 전해지는데 말년에 손바닥에 휘갈겨 썼던 글 조각들을 모아서 쓴 글이라고 한다. 심지어 종이와 연필조차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아서, 바늘을 사용해서 자신의 손톱에 글을 썼다는 말 조차 전해지고 있으니.. 결국 책의 집필과 구성이 끝나기 전에 파스칼이 세상을 떠나서, 사후 출판이 되지만. 교재로 사용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는 책이라고 하며, 그가 쓴 프로방샬 서간(시골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Provincal Letters) 같은 경우는 초기 프랑스 문학의 본보기가 될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오늘날 이용되고 있는 외바퀴 손수레를 발명하게 된다. 또 포트-로얄과 가까이 지내던 당시, 포트-로얄을 위해서 상업용 교통 노선 운영을 제안한다. 1662년에 시해되었고 이 진행이 매우 빠르게 확산되었다고 하는데. (물론 교통수단은 말이다. 다만 이게 오늘날 버스 노선과 같았다고 하니 한번 타는데 동화 5닢 정도라고 한다. )
9. 업적
1936년. 메르센느 회합에서 '원추곡선의 기하학' 발표
1640년. '원추곡선론(Essay on Conic Sections)' 출판.
1647년. 기압과 관련된 실험을 통해 진공의 실재 조건 증명.
1647년. '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들(New Experiments Concerning Vacuums)' 출판.
1653년. '유체평형에 관한 논문(Treatise on the Equilibrium of Liquids)'
1653년. '원추곡선론의 일반화(The Generation of Conic Sections)' 출판
1654년. 원뿔곡선 일반론 작성. '산술삼각형론(Traite du Triangle arithmetique)' 책 서술.
1654년. 페르마와 5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확률론의 기초를 다짐. 후에 보험금 계산, 유전학 연구, 통계처리, 기체 운동의 연구 등의 대단히 중요하게 쓰이는 수학에서의 새로운 분야를 정립하는데 기여.
유체는 모든 방향으로 같은 압력을 전달한다. ('파스칼의 원리') -> 후에 스포이드와 수력 브레이크 발명에 이용.
10. 종교? 과학?
1650년. 건강이 나빠지면서 수학 포기.
1653년. 다시 짧은 기간 돌아와서 페르마와 서신을 나누며 확률론 개척.
1654년. 마차 사건 이후로 다시 종교에 충실.
1658년. 다시 딱 한번. 8일정도 과학으로 돌아와서 사이클로이드 발견
파스칼의 지론에서는 감성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감성, 영혼의 문제이고 과학은 지성의 문제이다. 이 두 개념은 다른 문제고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모순 없이 종교와 과학을 모두 믿을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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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나쁜 시각에 의해 그의 눈이 가려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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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스칼 편은 수학자의 조사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인간적인 모습만 조사한 듯 하다.
사실 물리학이나, 확률론 쪽으로도 할 말이 정말 많은 수학자인데, 이 부분도 시간이 나면 그림도 추가하고 해서 덧붙여 볼 계획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을 믿음으로써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그러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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