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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추구하는 광인들

페르마 - 7번째 수학자

by bluefriday 2012.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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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어떤 수학자를 조사할까 고민하다가 찾아본 페르마. 돌이켜보면 수학자와 그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마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봤던 책 한 권이었던 듯 하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라는 이름의 책이었는데, 글을 검토하는 현재(2020. 2Q)는 어떤 책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정수론과 그에 얽힌 여러가지 수학적 일화들을 가볍지 않은 정도의 자세함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동일한 책이 아닐 수도 있으나, 한 번 읽어보면 전반적인 정수론 이해에 매우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페르마 조사 시작에 앞서서, 분명 FLT(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중앙도서관을 뒤져도 역시 대부분의 내용이 마지막 정리에 대한 부분이다. 확실히 페르마에 대해서 조사하려고 생각하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건드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1. 이름 : 피에르 드 페르마 (Pierre de Fermat)

2. 출생 : 1601(?) ~ 1665


1601년 8월 17일에 태어나서 1665년 1월 12일에 카트레(Castres) 또는 툴루즈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무덤이 툴루즈의 아우구스티노스 교회에 있는데 나중에 지방 박물관으로 이장된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사망 날짜와 함께 57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뭔가 태어난 날짜가 맞질 않아서 보통 페르마의 출생년도는 '?' 로 표시한다.

3. 고향 : 프랑스 서부 보몽드로마뉴 (Beaumont-de-Lomagne)

4. 국적 : 프랑스

5. 직업 : 법률가, 저널리스트, 언어학자, 철학자. 수학자 조사인데도 불구하고 직업에 수학자라고는 적지 않았다. 페르마는 1648년에 툴루즈 지방 의회의 칙선의원이 되는데,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남는 개인시간에 수학공부를 취미로 했다고 해서 (프로) 수학자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수학사가인

에릭 템플 벨

이, 수학의 역사에 대해서 편찬하면서, 페르마를 '아마추어 수학의 왕자'로 분류한다. 이 호칭이 지금까지도 페르마에게 붙어 다니는 것 같다.

6. 가족 
아버지 '도미니크 페르마'는 가죽 판매를 하는 번영한 상업가 출신으로 보몽 지방의 집정관(지금의 최고 행정가)였으며, 어머니인 '클레르 드 롱'은 의회 법학자 가문의 딸이었다.


7. 일생

출생기록이 맞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1601년 8월 20일에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페르마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행정관이 되도록 교육시켰다고 하는데 실제로 페르마는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행정관이 되어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가정에서 교육을 받다가, 지역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가서 초등 교육을 받게 된다. 1629년 후반에는 보르도(Bordeuax-와인으로 요새 유명한.)로 이사를 간다고 하는데, 대학은 툴루즈 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봐서, 중간에 다시 이사를 간 것 같다. 아무튼, 툴루즈 대학에 입학해서 로마법으로 학위를 받은 페르마는 1629년 고전에 쓰인 정보를 바탕으로 고전을 복원하는 작업에 가담하게 된다. 이 때

파푸스

의 <

수학집성

>에 인용된 내용에서

아폴로니우스

의 <

평면의 자취

>를 복원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30살이 되던 해에는 툴루즈 지방 의회의 의원이 되고, 뒤이어서는 왕의 칙선 의원(king's councilor)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페르마가 수학을 취미 수준으로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최고 수준의 수학적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데, 아마도 페르마의 직업적 위치가 다른 유력인사들과의 뇌물 및 매수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비공식적인 접촉을 피해야 하는 직업이었기에, 주변의 압력을 받지 않고 내부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일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1631년에는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률학으로 학위를 받게 되고, 같은 해에 어머니의 사촌인 루이즈 롱과 결혼하게 된다. 이 루이즈와의 사이에서 페르마는 3남 2녀를 두게 되는데, 이 가운데 클레망 사무엘이 아버지의 업적에 대한 유언 집행자가 되어 유작인 책을 출판하게 된다.

1637년 이전까지는 완성된 접선과 구적법에 관한 논문에서 많은 새로운 곡선을 해석적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실제로 페르마의 쌍곡선, 포물선, 나선 등이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뒤이어 바로 소개하게 될 페르마의 조용한 성격과 서신왕래로만 연구 성과를 교류하는 행동으로 인해서인지 도서관의 많은 책들을 찾아 보아도, 이 후로 페르마가 죽기 전까지와 죽을 당시의 장면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정말 너무나도 조용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듯하다.


8. 성격
페르마는 매우 조용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개혁파였던

갈루아

나, 종교적으로 많은 활동을 보인

파스칼

과는 다른 일면으로 정말 평범하고 문제없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에 임했고, 또 직무에도 유능하고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페르마와 직접적으로 연관 되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비교해 볼만한 부분으로,

데카르트

는 수학의 논쟁에서 자주 분개하고 화를 내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페르마는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그리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상대방을 대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부분은 오히려 오일러와 비슷한 듯하다. 이에 대해서 아마도 페르마의 직업이 법률가이고,

데카르트

는 전 직업이 군인이었던 데 이유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9. 업적
17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불리는 페르마. 그는 특별히. 수론에 있어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론학자'로 인정받는다. 3000개가 넘는 수학논문과 기록을 남겼지만, 공개적으로 발표한 논문은 단 하나.  그것마저도 자신의 이름이 아닌, `M.P.E.A.S.` 라는 가명(필명)을 사용하여 발표한다. 이 가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검토를 하는 현 시점(2020. 2Q)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물리학에도 관심을 두어 '빛은 어느 매질 속에서든 가장 빠른 길을 택한다'는 '최소시간의 원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다시 돌아와서 수학 쪽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폴로니오스

의 업적을 재편성하는데서 출발하여 정수론 분야에서 소수(prime number)에 대하여 연구, 그리고 '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해법 연구에 공헌함으로써 정수론 발전에 기여한다. 보통 정수론 계보에서 큰 획을 긋는 수학자로, '

디오판토스

-

피보나치

-페르마' 를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좌표기하를 고안하여,

데카르트

와 함께 '좌표기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654년에는 어릴적 친구인

파스칼

과는 서신왕래를 통하여, 확률론의 기초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점수문제나 상금문제와 관련된 여러 확률 문제들에 대하여 다뤘는데. 이 연구를 토대로 1657년

호이겐스

가 확률론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논문을 쓴다. 그 뒤로

드 무아부르, 다니엘 베르누이, 오일러, 라그랑주, 라플라스

등이 확률론의 분야를 발전시키게 된다. 또한 복소 해석학 측면에서는 미분법에 대하여 연구하였다고 한다.

뉴턴

은 자신이 페르마의 접선 계산법에 기초해서 미분법을 개발했다고 말하였다.

또한 페르마가 살아있는 동안에 출판 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들을 통하여 출판된, "

평면과 입체의 자취 입문(Isogoge ad locus planos et solidos

)"은 해석기하학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조금 늦게 발표되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해석기하학을

데카르트

의 발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데카르트

의 <기하학>이 나타나기 전에 발견했다는 점과 그의 연구가 1679년에 <

수학의 여러연구(Varia opera mathematica)

>로 발표되기까지 원고형태로 돌아다녔다는 점은 분명하다. 게다가 페르마의 증명은

데카르트

에 비해서 훨씬 체계적이었고, 세로축을 가로축에 대해 수직으로 잡는 등의 방법은 오히려

데카르트

에 비해서 현대해석 기하학에 더 가깝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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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극도로 아름다운 정리를 아주 많이 발견했다.

" - 페르마

수학적으로 아름다운 정리를 많이 발견했다고 하는 페르마 할아버지. 같이 볼수 있게 '여백을 좀 크게 잡으셨으면' 하는 바람을 남기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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