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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 - 3번째 수학자

by bluefriday 201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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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2. 출생 : 1646.7.1 ~ 1716.11.14 (독일 라이프치히)
3. 가족 :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대학교수(윤리학)인 아버지, 저명한 법률가의 딸인 어머니
4. 국적 : 독일
5. 직업 : 수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신학자, 외교관, 편집장, 과학자, 언어학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인


수학적 사고에는 두가지의 광범위하고 대조적인 영역, 즉 연속적인 영역과 이산적인 영역이 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이 두가지 영역에서 모두 최상의 수준에 있었던 수학사에서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기호 논리학의 기초를 구상한 라이프니츠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1652년. 그러니까 6살때 아버지(Friedrich Leibniz)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 시기에 라이프니츠가 교육받은 윤리나 종교적 가치관이 라이프니츠의 일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7살때 니콜라이 스쿨에 입학했는데 이미 이 당시에도 수학, 법학, 종교학, 철학, 역사, 문학 등에 다방면으로 뛰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12살때는 독학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마쳤다고 하는데 아마 대학 교수셨던 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려는 게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다.  

이로부터 3년뒤, 그러니까 15살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간다. 여름 학기 때 잠시 예나(Jena)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 바이겔 교수에게 수학을 지도 받으면서 논리학과 철학에 있어서 수학적 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돌아와서 라이프니츠 대학에서 학사 논문인 < 개인의 본질에 관하여. (De Principio Individui) > 로 학사 학위를 받는다. 사실 20세 때 이미 법학 학사학위 취득을 준비했지만 너무 젊어서 학위를 받지 못 했다고 한다. 

그 뒤에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가서, 바이겔에서 배운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수학과 철학을 접목시킨 논문인 < 조합기교에 관한 논문. (Dissertatio de arte combinatoria, 1666) > 를 통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후에부터가 진짜 라이프니츠의 일생이야기지만, 요약적으로는 직후에 외교관이 되어 마인츠의 선제후, 브라운 슈바이크가, 하노버가를 위해서 40여년의 생을 보낸다.
 
* 선거후, 선제후 :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중 황제 선거권을 가졌던 제후
 
1670년 에는 < 신물리학의 가정. (Hypothesis physica nova) > 을 공표하고 그 2년 뒤에는 외교관 임무로 파리로 가게 된다. 이 때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을 제안하는데 아마 이건 루이 14세가 유럽, 특히 독일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바꾸게 하려는 의도 였다고 한다. (성사 되지는 않았지만, 후에 나폴레옹은 실제로 이집트를 침략한다.)
 
아마 이 때의 파리 외교관 임무가 라이프니츠의 일생을 결정하게 된 것 같다. 여기로 일하러 가서 런던,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며 탄성과 응력에 관한 법칙으로 유명한 후크를 포함하여 보일레벤후크(네덜란드의 생물학자. 현미경 제작으로 유명하다.), 철학자 스피노자 등을 만나면서자신이 지금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동안의 수학적 공부가 고대의 걸작에 한정된 편협한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아무튼, 수학의 집중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선 그 당시 만나던 명사들 중 네덜란드의 과학자인 호이겐스를 만나러 간다. 호이겐스(사이클로이드의 연구, 호이겐스의 원리로 유명한..) 는 라이프니츠에게 파스칼의 논문을 추천하면서, 삼각수의 역수를 구하는 문제를 내주는데 라이프니츠의 초기 미적분 연구에 이 무한급수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호이겐스가 라이프니츠의 스승이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된 말이지만, 어쨋든 젊은 외교관을 지도하고 현대 수학의 문제를 연구하게 하는 인도자 정도의 역할은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파스칼의 계산기에 곱셈 기능이 추가된 계산기를 만들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또 이때, 호이겐스와 함께 운동에너지의 개념을 새롭게 전개했는데 이게 에너지 일반이라는 더욱 넓은 개념의 일부가 됬다고 한다. )
 
1673년에는 외교관 정부사절로서 런던에 가게 되는데, 이 곳에서 올던버그콜린스를 만나서 왕립협회의 회원이 된다. 아마 이 부분이, 역사에 자주 나오는 라이프니츠와 뉴턴과의 미적분에 대한 우선권 싸움의 시작이 된 것 같다. (뉴턴의 <해석> 사본을 이 때 런던에서 봤을 지도 모르지만 이 당시에는 라이프니츠가 기하학이나 해석학에 대해서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말 뉴턴의 논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논문을 읽긴 읽었나 보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회람 논문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아서, 더 상세한 내용을 알려줄 것을 왕립협회의 사무관을 통해서 전달하고 뉴턴은 그 유명한 '1676년의 두 편지 (전서한과 후서한)' 으로 알려진 답서를 뉴턴에게 보낸다.
 
1676년 무렵에는 뉴턴이 몇년 전에 얻은 것과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1682년 무렵에는 멩케(Otto Mencke)와 함께 학술기요(Acta Eruditorum)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편집장(푸리에도 그렇지만 이 사람도 직업이 참 다양하다.)이 된다.
 
이 와중에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는 계속했다고 한다. 이미 파리와 런던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점점 그의 미분법이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1684년에는 그의 무한소 해석에 관한 최초의 논문인 < 분수량에도 무리수량에도 장애없이 적용할 수 있는 극대와 극소 또 접선에 대한 새로운 방법 그리고 그것을 위한 특이한 계산법. (Novo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 itemque tangentibus, quanec fractas, nec irrationales quantitates moratur et singulare proillis calculi genus) >. 이 논문에서 최초로 dx와 dy 도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1686년에는 라이프니츠의 논문 < 깊이 고찰된 기하학과 불가분량 및 무한량의 해석에 관하여 > 에서 지금의 적분기호를 최초로 도입한다.
  

또 이 외에도 라이프니츠는 베를린을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하여 1700년대에 베를린 아카데미를 창설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고 한다. 거기다가 이와 유사한 학회를 드레스덴, 빈,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도 창설하고 베를린 아카데미의 초대원장이 되어 평생을 역임한다. (전술한 외교관 일도 평생 했다고 하니 2가지를 겸직하면서 그 가운데 논리학, 철학, 수학 공부를 다 한 셈이다.)
 
시간이 흘러, 1716년 11월 14일 하노버에서 실의와 고독 속에 일생을 마친 후에 하노버의 노이슈타트 교회에 안치된다. 자신을 옹호해주던 하노버가가 모두 영국으로 건너가서 없었고, 충실한 비서와 가노들만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수학사의 기호 측면에서도 많은 공헌을 했다. 통계적으로는 오일러 다음으로 많은 기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dx, dy (최소의 차. 미분을 의미)

∫ (integral) 

 f(x)

 선형대수의 행렬식

 초월함수 명칭

미분의 곱셈정리 최초 증명

논리적 명제의 대수적 기호

 닮음의 기호 '~'

 합동의 기호

 비례식 표현의 ' : ' 

 

 

*행렬식의 경우, (1693년 로피탈에게 쓴 편지에서 최초로 행렬식의 전신을 언급한다.)

항상 적절한 기호의 사용이 사고를 돕는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현대의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한테 많은 도움이 된 수학자이다.

 
수학자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는 다방면에서 능통했다고 한다. 먼저 시인이기도 했다. 시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라틴어로 쓴 시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혹자는 그를 '후기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또 낙관론자여서 만국 공통어를 생각했다고도 하고 종교론적으로는 카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신교)와의 통합을 주장하다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자, 뒤에는 신교의 두 종파를 통합하기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탁월한 신학자이기도 했다. 복소수의 양면성에 대하여, 허수란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쪽의 성질을 함께 갖추고 있고, 이런 의미로 크리스트교 신학의 성령과 비슷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게다가 산술에서의 2진법도 신학적인 견해를 적용해서 2진법이란 1인 신과 0인 무에서 전부를 만들어내는 창조를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과학에 관심이 있는 중국의 황제를 같은 논법으로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중국에 선교사를 보낸 예수회의 수사인 그리말디(중국 수학 위원회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중국 황제를 개종시키면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국 사람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낙관론자보단 이상론자에 가까운 모습이다.
 
수학, 언어학, 산스크리트학, 철학, 법학, 종교, 정치, 역사, 문학, 논리학등에서 뛰어난 업적과 천재성을 보인 라이프니츠.
 
업적이 너무 많아서 전부 적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위의 나열한 것들 외에도, '이항정리를 다항정리 (x+y+z)^n 과 같은 3항 이상으로
된 식의 전개식으로 일반화했다'는 그런 소소한 것들까지 너무나 많다.
 
라이프니츠의 일생에 대해서 조사하다보면 뉴턴과의 여러가지 일화나 관련 사건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마저 다 설명하면 너무 많아서 그건 나중에 따로 뉴턴을 조사하고 그 뒤에 특집 같은 식으로 조사해 봐야겠다.
 


"복잡한 추론을 포기하고 불변의 기호들을 선택한다면, 논쟁을 쉽게 끝낼 수 있고 어떠한 분파도 침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잘못된 추론은 '계산 실수' 에 불과하다. 두 회계원 사이의 토론이 필요 없듯이, 두 철학자 사이에 논쟁이 발생해도 토론이 필요 없다. 그들은 펜을 들고 계산대에 앉아서 상대방에게 "계산해보자" 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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